뭉크의 '절규'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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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의 '절규' 그리고...
  • 광주전남일보
  • 승인 2017.10.27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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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동주 영광교육장.

노르웨이의 오슬로 국립박물관에는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의 작품 '절규'의 진본(眞本)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나와 자연을 뚫고 나오는 소리’라는 '절규'는 다리를 건너는 뭉크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 합니다. 필자(筆者)는 4년 전 그 곳에서 그 작품을 감상하면서 왠지 모를 불안감 같은 묘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인상주의가 눈에 보이는 외부의 대상을 보이는 대로 그린 것이라면, 표현주의는 보이지 않는 마음속의 세계를 그리는 것입니다. 표현주의 관점에서 사물은 보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달리 보이며, 감정과 감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선이나 형태, 색상, 구도 등은 그러한 표현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회화에서 중요한 요소인 원근법까지 무너뜨렸습니다>

오늘, 사랑하는 사람과 속삭이며 걸었던 길은 아름다울 수 있지만, 갑자기 이별 통보를 받은 다음날 걷는 그 길은 어제처럼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길은 달라진 것이 없지만 내 마음이 바뀌니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표현주의는 그림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화가의 내면을 온전히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뭉크에게 그림이란, 자신의 내면을 밖으로 그려 표현하는 하나의 엄숙한 작업이었습니다. 화가란 눈앞의 광경보다는 자신의 내부까지를 묘사해야 한다는 그는 이제 유형의 것을 그리는 것은 카메라를 따라갈 수 없으니, 화가들은 내재된 무형을 그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프랑스의 화가 폴 고갱(Gauguin, Paul)이 ‘보기 위해 눈을 감는다’라고 한 말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뭉크가 살던 19세기 말에는 세기말적 현상이 사회에 만연(蔓延)했으며, 20세기 전반에는 1,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 불안, 우울, 실존 등….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실존주의 철학을 등장하게 합니다. 실존은 ‘고독’이며, 고독은 ‘불안’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며, ‘인간은 신과 허무의 중간자’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그냥 생각하는 갈대가 아니라 ‘허무에 떠받쳐진 가느다랗고 약한 하나의 갈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과 ‘허무’의 중간자인 인간은 항상 고독하고 불안합니다.

불안의 동의어는 ‘미확정’입니다. 차라리 위험이 무엇인지 뚜렷이 보이면 덜 불안합니다. 현대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의 위험은 확정되지 않았으며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고, 위험이 너무 크므로 통제할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뭉크의 '절규'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림 속에서 절규하는 사람의 눈, 코, 입 그리고 얼굴 형태도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림의 뒤쪽에 있는 두 사람도 여자인지, 남자인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가 하늘이고 어디까지가 강인지 그 경계도 불분명합니다. 이 그림에서 확정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확정되지 않았으니 그림은 보는 사람이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결국 이 그림 속에 숨겨진 메시지는 현대인들의 삶의 궤적(軌跡)이 대단히 불안스럽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불안, 사회적 불안, 물질적 불안, 가치관의 불안, 다양한 경쟁 속에서의 이기적 불안 등 우리는 온통 불안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불안의 그물망에는 좌절, 중상과 모략, 배신 등이 동거(同居)합니다. 그래서 현대사회의 대부분의 젊은이는 좌절하고, 일부 기성세대들은 중상하고 모략하며, 우리 모두가 배신의 개연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참으로 슬픈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뭉크처럼 절규하는 것입니다.

그 절규 속에 지지리도 못난 ‘나’를 투영시켜 봅니다. 
나는 하염없는 불안 속에서 속절없이 좌절하지는 않았는가? 
나는 온갖 중상과 모략으로 내몰려 피를 토하는 아픔을 겪지는 않았는가?
나는 날선 배신의 칼날 앞에 아무런 대책 없이 주저앉지는 않았는가?
나는 오늘날의 이 그늘진 삶을 ‘운명’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 버거워, 차라리 피할 수 없는‘숙명’이라 치부(置簿)하지는 않았는가?
아! 그리고 나는 그것들로 인해 앞으로도 얼마나 더 깊은 가슴앓이에 몸부림쳐야 하는가?
뭉크가 그랬듯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던 시인 윤동주가 절절히 생각나는 만추(晩秋)의 오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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